자투리/그때 그시절

소년 교양지`의 추억

건빵눈 2009. 6. 6. 16:08

그리운 '소년 교양지'의 추억

 

 

 

자료실을 정리하다 보면, 그 존재의 부재에 대해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 있으니

그것은 70-80년대 국내 소년 잡지 트로이카였던

뭐, 지금은 이러한 책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가 까마득한 기억이 되어버려

사회적인 의미부여 조차 거의 되고 있지 않습니다만,

인터넷도 없던 시절 우리네 소년소녀들에겐

최고의 교양지식(과학, 문학, 시사, 세계 등)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 잡지들의 역사와 의의를 조명해 봅니다.



 

새소년 1964.5~1989.5


일제시대 때 최남선 선생이 펴낸 <소년>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요.

이 잡지가 6.25 전쟁으로 발행이 중단되자

수년 후 이를 안타까워한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어문각 초대 편집장)이

<소년>의 발행인이었던 대한교과서 김광수 사장과 함께

<소년>을 잇는 의미로 창간한 잡지가 바로 <새소년>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아동문학지 형식이 강했지만 이후 어린이들을 위한 다채로운 기획 기사들이 보강되었고,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만화의 비중을 높여

고우영의 <대야망>, 길창덕의 <신판 보물섬> 등과 같은 고전들이 연재되었는가 하면 

당시 독일에 거주중이었던 이원복(현 덕성여대 교수)이

매달 국제우편으로 원고를 보냈던 장기 연재작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꿈같은 시절 국내 어린이들에게 세계성을 심어준 정말 좋은 만화였습니다.





이밖에도 <새소년>에는

김형배의 <20세기 기사단>, 김수정의 <홍실이>, 이우정의 <수리수리 마구단>, 허영만의 <변칙복서>,

이정문의 <심술 1000단 심똘이>, 김동화의 <멜로디와 하모니> 등과 같은 인기 만화들이 연재되는 한편,

새소년 클로버 문고라는 자체 만화문고 브랜드를 만들어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물론 당시 클로버 문고는 발행권수를 늘리려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금지되어 있었던 일본 만화들을 가공의 한국 작가 이름을 붙여 출간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공중파 방송들도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던 무렵이라 그냥 묻어가는 분위기로;;


그 바람에 발생한 대표적인 아이러니로는

<바벨2세>의 원작자로 표기되어 있었던 김동명이라는 만화가를 만나게 해달라는 팬레터가

당시 <새소년>에 산더미처럼 배달되었다고 하지요.. ㅋㅋ





1980년대 <새소년>은 새로운 사업 영역을 모색하게 되는데,

당시 일본에서 완구회사 반다이와 애니메이션회사 선라이즈가

<기동전사 건담>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고 그것과 비슷한 시도를 해봅니다.


아카데미과학교재사와는 매우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특히 매년 5월 5일 어린이 독자 100명을 특별 초대하여 아카데미과학교재사를 견학시켜주는 이벤트는

<새소년>의 대표적인 연중행사였고,

신흥 뽀빠이과학이 등장한 이후로는

김청기 감독의 서울동화를 후원하는 양대 스폰서로 나서서

그 시절 김청기 감독의 애니메이션들을 지원했죠.



그리고 이때 영감을 얻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새소년>이 폐간될 무렵

김청기 감독은 월간 <우뢰매>라는 애니메이션 잡지를 창간하게 되는데,

외형은 애니메이션 잡지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과거 소년 교양지의 형식을 상당 부분 계승한 것을 보면

<새소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새소년>은 국내 소년잡지의 근대화를 선도했던 대표 잡지로

여러 부분에 첫발을 내디디며 많은 실험적 시도를 했던 잡지였으나

1989년 5월 창간 25주년 기념호를 끝으로 사라져버립니다.

개인적으로 어린시절 새소년 애독자였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ㅠ.ㅜ


어깨동무 1967.3~1987.5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세운 육영재단에서

<새소년>이 나온 지 3년 후에 창간한 또 하나의 소년 교양지입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타계한 후에는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가 발행인 자리를 이어 받아 새로운 시도들을 해가게 되는데,

특히 육영재단 소유의 어린이회관과 연계한 다채로운 이벤트들이 자주 열려서

그 시절의 어린들에게 특별한 추억들을 선사해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깨동무>는 새소년의 ‘클로버 문고’에 대항하기 위해 만화 부문에 특히 많은 신경을 쓰며

신문수의 <도깨비 감투>, 김원빈의 <주먹대장>, 박수동의 <소년 고인돌>, 윤승운의 <요철 발명왕>,

이상무의 <울지 않는 소년>, 고유성의 <번개 기동대>와 같은

국내 대표 만화가들의 대표작들이 다수 연재 되었고

이러한 <어깨동무>의 만화사랑은 1982년 10월에 창간되는 보물섬에 의해서 결실을 보게 됩니다.





특히 <보물섬>의 마스코트와도 같았던 김수정의 최고 히트작 <아기공룡 둘리>는

봉제 인형으로까지 만들어져 <보물섬> 특별 부록으로 배포되었고,

당시 이 인형 하나를 타기 위해서 타 잡지를 보던 독자들이

눈물 흘리며 부모님을 졸라야 했던 에피소드들은 잊을 수 없죠.


다만 <보물섬>이 너무 잘 팔리자,

육영재단에서는 이후의 출판 중심을 <어깨동무> 보다 <보물섬>쪽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1988년 순정만화 전문 잡지 <르네상스>가 등장하자

<댕기>를 곧바로 창간해 만화 잡지만 전문으로 출판하는 형태로 옮겨가게 됩니다.


때문에 <어깨동무> 자체는

전통과 역사에 비해 너무나도 조용히 폐간되어 버린 것 같아 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ㅠ.ㅜ


소년중앙 1968.1~1994.9


<새소년>과 <어깨동무>의 성공을 지켜보던 중앙일보사가 1968년 1월 야심차게 창간했던 잡지입니다.


그러나 창간 초기 지면을 채울 콘텐츠가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에

당시 모기업 삼성의 계열사였던 TBC 동양방송이 일본과 합작으로 제작중에 있었던

애니메이션 <황금박쥐>의 원작 만화가 무려 별책부록으로 제공되기도 했죠.




하지만 일시적인 방편이었고 보다 근본적인 콘텐츠 수급 해소를 위해서

<소년중앙>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업계에서는 큰 풍파가 있었는데요.


당시 잡지의 판매부수를 담보하고 있었던 인기 만화가들을 스카웃하려는 과열경쟁이 일어나면서

각 잡지사 편집부는 거의 전시 체제처럼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새소년>의 별책부록 ‘만화왕국’에 연재되고 있었던 길창덕의 <꺼벙이>가

엄청난 이적료를 받고 <소년중앙>으로 배를 옮겨 타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창간 초기에는 이렇듯 잡음도 있었습니만,

이후 이상무의 <독고탁> 시리즈, 이우정의 <갈기 없는 검은 사자>, 신문수의 <로봇 찌빠>,

이향원의 <이겨라 벤> 등과 같은 소년중앙표 인기 만화들이 등장하면서 자리를 잡아가죠.


특히 <소년중앙>은 중앙일보사가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기사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경쟁지들보다 더 많은 읽을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7080 세대의 영원한 흥미거리인 '세계의 미스터리류'의 기획기사들은 언제나 인기만발이었고

첨단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지식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까닭에

저 시절 많은 국내 어린이들이

1순위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라고 말했던 것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클릭해서 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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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년중앙>은 국내 최대의 출판제국으로 일컬어지는 중앙(現 중앙M&B)의 영업라인을 통해

후발주자임에도 엄청난 발행부수를 앞세워 시장을 잠식해 갔는데요.

이때 가장 주요했던 마케팅 전략이 바로 표지 모델이었습니다.


<새소년>과 <어깨동무>가 잡지의 출신 성분(아동 문학지로 출발)의 영향으로

바르고 정직한 대한민국의 소년소녀들을 표지 모델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에 반해,

<소년중앙>은 연예지 성격을 살짝 첨가하며 아역 배우들을 대거 기용했던 것이죠.



 당시 뽀빠이 이상용과 함께 <모이자 노래하자!>를 진행하며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어린이 연예인 장서희가 표지 모델로 나왔던 <소년중앙>



 똑순이 김민희와 <쇼 비디오 자키>의 어린이 스타 이재은 등도 모두 거쳐감